
원래 사람은 힘들었던 것을 좋았던 것 보다 더 잘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었던 날들을 기뻤던 날들보다 더 오래 기억한다. 어떻게든 해냈고 버텼다는 기억이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날들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고는 한다. 그때도 해냈잖아. 이번에도 할 수 있다고. 그때보다는 지금이 덜 힘들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이상한 사실이 하나 있을 것이다. 사실 정말 나를 지탱해온 날들은 그렇게 힘겹게 버텨온 날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던 날들. 힘들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었던 그냥 평범한 날들. 그 날들이 나를 지금까지 지탱해준 기반이다. 이 글은 왜 그 아무 것도 없던 날들이 나를 지탱해올 수 있었던 진짜 기반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왜 ‘버틴 날’만을 중요하게 여길까
버틴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버틴 날에는 이야기가 있다. 기승전결이 있고 특별하게 기억할 거리가 있다. 이런 날들은 이야기로 남기기 쉽고 스스로에게도 설명하기 편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던 날들은 특별한 서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기억에 남지도 않고 잊히기 쉽다. 하지만 이 생각에는 착각이 하나 크게 있다. 삶은 극복의 연속만으로는 버텨지지 않는다. 고난과 극복, 고난과 극복 그 사이에는 평범한 날들이 다리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그 날들이 다음 고난과 극복을 견뎌낼 힘을 준 것이다.
버틴 날은 삶을 증명하지만, 유지시키지는 않는다
버틴 날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날이다. 그 기억은 삶을 증명해주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기억이 삶을 유지시켜주지는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버틴 날이 거듭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고난을 많이 겪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만큼 지친다. 견디기만 하는 삶은 유지가 불가능하다. 계속해서 소모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소모만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언젠가 지쳐 쓰러진다. 이 소모를 견디게 해주는 회복의 날이 바로 아무 것도 없던 날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에너지를 쓰지 않고 하루를 푹 쉬는 날들이 우리를 회복하게 해준다. 그렇게 해야 삶이 힘을 얻는다.
평범한 날은 삶의 기준을 정상으로 되돌린다
버틴 날은 다르게 말하면 고통을 겪은 날들이다. 그런 날들이 지속된다면 곧 고통이 나의 일상에 기준이 된다. 내 일상은 항상 힘든 일만 가득하고 그것이 기준이 되면 편하게 지내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던 날들이 고통으로 이루어진 기준을 초기화한다. 오늘 아무런 힘든 일도 없었고 지칠 일도 없었다면 마치 고통의 기준도 눈 녹듯이 없어진다. 이 경험은 내 삶이 꼭 힘들 필요는 없다는 것을 다시 알려준다.
습관은 버팀이 아니라 무사 통과에서 살아남는다
습관을 유지하는 힘도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습관의 성공을 고난과 극복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습관은 그냥 무난하게 지나간 날들에 의해 유지된다. 예를 들어 운동을 한다고 치자. 운동이 정말 힘들었고 온 몸의 힘이 다 빠진 날들이 운동의 습관을 유지시켜주는 것일까? 오히려 그렇지 않다. 가볍게 운동하고 스트레칭만 하는 정도여도 운동을 하는 날이다. 그런 날들이 아 오늘도 운동을 했구나 내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부담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습관이 오래가는 이유는 강해서가 아니라,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던 날은 습관의 부담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아무 일도 없던 날은 자기 신뢰를 조용히 쌓는다
극적인 성취가 자기 신뢰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별 일이 없었어도 무너지지 않았던 경험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오늘이 조용하게 지나갔어도 내 하루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그 느낌. 그 느낌과 기억이 내일을 위한 발판이 되어 사람에게 내일을 맞이하는 것을 덜 두렵게 만든다. 이런 신뢰는 위기가 생겼을 때 더 진가를 발휘한다. 진짜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이미 내 정신과 몸이 완전히 충전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던 날을 존중하는 태도
아무 일도 없던 날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날을 특별하게 만들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 날을 평가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오늘 별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고 해도 나를 깎아내릴 필요도 없고 억지로 오늘에 의미를 둘 필요도 없다. 이 태도가 삶을 더 편하게 만들어준다. 모든 날에 고난이 있고 그 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삶은 심호흡한다.
삶은 극복이 아니라 유지로 이어진다
삶을 고난과 극복의 연속으로 기억하려 할 필요는 없다. 그런 날들이 반복된다면 우리의 삶은 점차 지쳐갈 것이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던 날들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내가 극복하고 버텨온 나날들이 나를 증명시킨다면 조용히 지나간 아무 것도 없던 날들은 나에게 숨을 불어넣어줬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 삶은 더 길게 이어진다.